lacri [2] · MS 2002 · 쪽지

2013-02-19 12:5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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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과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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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입시에서 오르비 표본 기준으로 서울대 수학과의 평균점수가 이과 학과들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http://orbi.kr/0003607290 )



서울대 의예과는 적어도 최근 20년간 합격선(커트라인)과 평균점수 모두 문이과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도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던 소위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었다. 서로 다른 계열인 문과와 이과를 공정하게 비교하는 것이 곤란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비교를 해 보자면, 4년 전 로스쿨이 생긴 이래 법대 학부가 폐지되기 전에는 지금 문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영대보다도 더 평균점수가 높았던 곳이 법대였는데, 문과생이 의대로 교차지원을 하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10년 전, 법대의 수장이었던 서울대 법대와 성균관대 의대에 3명이 중복 합격했을 때 그 중 2명이 서울대 법대를 포기하고 성균관대 의대에 등록했을 정도로 지난 10년 간 의대의 인기는 높았다. 서울대 의예과는 그 성균관대 의대를 포기하고 가는, 의대의 수장이었다.



그 서울대 의예과의 평균점수를 올해 서울대 수학과가 넘은 것이다.

물론 합격선 기준으로는 의예과가 여전히 가장 높은데다가, 올해 서울대 수학과 정시모집 정원이 7명에 불과하고, 수집된 표본은 그보다도 작을 것이기 때문에, 평균점수 추정치에 대한 신뢰구간이 대단히 넓어 실제 수학과의 합격자 평균점수가 의예과의 그것을 넘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오차 범위 내임을 감안하더라도 그간 서울대 의예과의 위상을 고려할 때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수학과의 부상이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수학과의 합격선은 02학년도에 저점을 찍고 그 이후 10여년 간 꾸준히 상승해왔다. 그 해 서울대 수학과(당시 자연과학대학)는 실질적으로 미달이어서 수능 자연계 총점 2등급(상위 11%) 이내라는 지원 자격만을 만족시키면 대부분 최종합격할 수 있었다. 그 후 수학과는 조금씩 합격선이 올라오며 공대와 수의대를 제쳤고, 마침내 0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생명과학부와 화학생물공학부를 제치면서 의대 다음 학과로 자리매김했다. 그 후에도 합격선은 계속 올라 3위 학과와의 거리를 넓혔다. 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서울대 뿐만 아니라 연세대 수학과의 합격선도 크게 올라 공대의 인기학과들을 모두 제쳤고, 고려대에서는 수학과가 포함되어 있는 이과대학의 합격선이 꾸준히 올랐다.



추가합격자 수는 학과간 선호도 순위를 따질 때 평균점수나 합격선보다도 더 의미가 큰 지표다. 예를 들어 어느 해 서울대 경영대의 경쟁률이 낮아져 합격선이 크게 떨어진 결과 연세대 경영대 보다도 낮은 합격선을 기록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서울대 경영대와 연세대 경영대에 중복합격한 학생들이 모두 서울대에 등록해서 서울대 경영대의 추가합격자 수는 0이고 연세대 경영대에서는 100명의 추가합격자가 나왔다면, 비록 합격선은 서울대가 더 낮았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의 선호는 명백하게 서울대가 더 높은 것이다.

서울대 수학과는 합격자들의 점수 분포 상 타 의대와 중복합격자가 많이 발생해, 의대 진학을 위해 종종 등록이 포기되는 학과였으므로 최근까지도 추가합격자 수가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올해는 한 명의 추가합격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은 수학과에 대한 선호가 다른 차원으로 진입했다는 명백한 신호다.



문과에 비해 이과의 학과들은 학과마다 서로 다른 expertise(전문적 지식)를 추구하고 그것이 향후 직업과도 직결되는 면이 많아 시대상에 따라 선호 학과들도 크게 변해왔다. 가장 큰 돈이 움직이던 분야가 최고 인기를 끌었다.

농업이 국가 기반산업이던 50년대에는 농대가 최고 인기였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하여 본격적으로 삽을 뜬 60년대에는 화공과와 섬유공학과가 최고 인기였다. 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이 성장하고 중동 건설 붐이 일면서 건축공학과와 기계공학과가 부상하였고, (다른 대학에서는 의대의 인기가 가장 높긴 했지만) 적어도 서울대에서는 물리학과가 최고 학과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80년대에는 반도체 산업이 성장하면서 전자공학과가 부상해 물리학과, 의예과와 함께 수위를 다투었고, 90년대 말 닷컴버블과 함께 컴퓨터공학과가 급부상하였다. 카이스트와 포스텍의 인기도 하늘을 찔렀다. 00년 닷컴 버블이 터지고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며 의대, 치대, 한의대, 교대, 사범대와 같은 안정적인 학과들이 상위권을 휩쓸었고, 잇달은 정리해고로 인해 밥그릇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던 00년대 초반에는 잠시나마 철도대학, 농협대학과 같은 전문대의 커트라인이 주요 4년제 명문대 커트라인에 필적하기도 하였다. 03~04년에는 황우석과 줄기세포 열풍이 겹치며 수의대의 인기가 급등해 건국대 수의예과의 합격선이 연고대 공대의 상당수 학과들보다 높을 정도였고 한의사가 고소득 안정직으로 부각되며 자연계 최고 학과로 부상했다. 00년대 중후반 여러 의대들이 의학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하면서 의전에 진학하기 유리한 생명공학부와 화학부의 인기가 급등하였다. 여전히 의대의 인기가 강력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조심스럽게나마 바야흐로 10년대는 수학과의 시대가 아닌가 물어볼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대학원 공부를 하는 사람이 많은 요즘 시대에는 대학에 입학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10년은 족히 걸린다. 인기 학과라 해서 입학했는데 직장을 가질 때쯤에는 막상 수요가 줄어있거나 공급이 과잉이어서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 보고 학과를 결정해야 한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수능 시험 범위밖에 없는 고등학생들에게 10년 후를 보고 학과를 선택하라니 참으로 난망한 일이다.

막상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도 잘 버는 사람은 극소수고 그들은 정말 축복을 받은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하며 입에 풀칠이라도 하면 다행인 사람도 비일비재다. 그닥 끌리지 않는 전공을 택해 그닥 끌리지 않는 직업을 갖고, 그닥 끌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사회의 '주류'다. 

대학 입학과 사회 진출까지의 10년 사이에는 온갖 불확실성이 가득 차 있고, 그런 불확실성은 시대가 지날수록 커지기만 했다. 평생 철밥통을 보장해주는 직업들이 제공하는 소득은 상당히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증가하지 않거나 물가상승률을 고려할 때 오히려 줄어들었다. 사회의 불확실성이 커진만큼 그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 것이다. 마치 안정적으로 이자를 지급해 주는 정기예금의 금리가 최근에 와서 계속 낮아지기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답이다. 수학과를 선택한 학생들은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일 것이다. 금융이 응용 수학과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비슷한 점수대 경쟁학과인 의대처럼 평생 직업과 대학 공부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단순히 소득과 안정성을 생각한다면 수학과에 진학할 학생들은 다른 어떤 학과든지 선택할 수 있었을 학생들이다. 수학은 순수학문이다. 순수학문은 배고프다. 하지만 그들은 최고 수준의 성적표를 들고도 불확실성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마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수학에 대한 순수한 흥미와 열정이었을 것이다. 부모님 치맛바람 속에서 딱히 하고 싶은 공부는 없었지만 어쩌다 만점에 가까운 수능 점수를 받은 학생에게 부모가 수학과 입학을 허하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들에게는 왠만한 TV 프로그램보다 수학 공부가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어쩌면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한 7명에게는 수학이 컴퓨터 게임보다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대학 입시를 치르는 세대는 단군 이래 최고 학력이다. 국민소득이 1만불을 넘어선 이후 태어났고, 금융 위기를 겪고 나서 교육에 목맨 부모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놀이터에서 공 한 번 못 차게 하고 조기교육을 시키면서 키운 세대다. 반면 출산율은 인류 역사상 최저 수준이어서 한 명의 자식을 나아 부모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가 모두 주머니를 털어 사교육에 천착해 자식과 손자 손녀를 키운 세대다. 그 결과 작년 국제 수학올림피아드와 화학올림피아드에서 한국 학생들이 세계 1위를 했다. 그런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수능 전과목을 다 맞거나 한두 문제 틀려 전국 100등 이내에 들어야만 간신히 서울대 수학과에 합격할 수 있는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우수한 인재들이 앞으로 한국 수학을 활짝 꽃피울 것이다.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공부를 즐길 수 있게 되면서 수학과 외에 그간 주목받지 않았던 많은 학문 분야들도 융성하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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