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뻐꾸기 [864236] · MS 2018 (수정됨) · 쪽지

2021-03-26 17:5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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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초스압)18살의대생) 베이비쿠쿠 합격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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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학생 시절


 중학교 2학년 나는 적당히 마음 맞는 친구 몇 명끼리 모여 다니며 살던, 그렇게까지 특별할 것은 없는 중학생이었다. 비행운-문문, Havana-카밀라 카베요 같은 노래들이 유행하던 2018년, 나는 각종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고, 외국어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다. 뭐 내가 사는 곳 외고의 경쟁률이 그렇게 크진 않았기도 했지만, 학교에서 외국어 관련 활동이 그렇게 많진 않았기에(과학고 입시를 많이 밀어주는 학교였다)  나는 그저 학교 시험이나 준비하면서 살고 있었다. 내가 가장 즐겁게 하던 일은 쉬는 시간에 친한 친구들 무리끼리 몰래 한 반에 모여서 수다나 떠는 것이었다.

공부 얘기로 돌아와 보면 나는 약 330명 정원 중 종합 성적이 십몇 등 정도 되었다. 하지만 2학년까지 본 지필고사 6번(1학년 2학기에는 자유학기제라고 하여 지필 시험을 보지 않았다) 중 첫 번째와 2학년의 두 번째 시험에서 총 두 번 1등을 차지했었다. 말하자면 태생부터 지필고사에 특화되고 과제나 수행평가에는 젬병인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돌이켜 보면 이게 그렇게 대단한가 싶지만, 당시 나는 ‘지필고사 1등’에 자부심이 아주 강했다. 

내신 성적은 상당히 좋았긴 하지만, 나는 이후 배울 내용을 선행학습하는 일은 '당시까지는' 거의 하지 않았다. 수학의 경우 한 학기에서 한 학기 반 정도 내용을 선행 학습했다. 이 정도면 거의 '예습'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영어는 명색에 외고를 준비하던 터라 꽤 공부한 상태였다. 다른 과목은 그냥 학교 수업만 따라갔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대해 별 위기감은 없었다. 수업 잘 들어 주고 외울 것만 외워 주면 잘 나오는 게 중학교 시험이기에 고등학교에 가서도 이런 식으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나에게 입시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한 것이 바로 2019학년도 수능 국어, '역대급 불수능'이라고 불리던 그 시험지이다. 지능지수 같은 것에 흥미가 많던 친구 하나가 나에게 그 시험 중 지문 하나를 프린트해 와서 나에게 풀어보라고 했다. 문제를 본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모의고사 형식 국어문제를 처음 본 게 그것이니 당연한 결과이긴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입시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입시 관련 사이트에 가입하여 한동안 게시글을 탐독했다. 수능 시험의 시스템이 어떻게 되는지, 공부법은 어떻게 되는지, 학원은 어떤 종류가 있는지, 어떤 책이나 인터넷 강의를 보고 공부해야 하는지 몇 주가 지나자 대강 알게 되었다. 수학의 정석 책을 사서 풀기도 하고 인강(인터넷 강의)을 결제하여 고등학교 1, 2학년 대상 강의를 이해도 제대로 안 되면서 무작정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해가 안 되던 강의도 몇 달간 듣다 보니 이해가 점차 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마음에 재미를 붙였다. 반면 내가 관심을 두지 않던 ‘잡다한 지식’을 외워야 하는 중학교 공부에서 점점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상기한 입시 관련 사이트에서 검정고시와 관련된 정보를 목격했고, 관련 정보를 찾아보며 나는 학교를 나와 혼자 수능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측면, 어쩌면 또래 친구들보다 일찍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생각, 학교 수업은 다 아는 내용을 가르치거나 내가 전혀 관심 두지 않는 내용만을 가르친다는 생각, 개인적인 가족 사정으로 일찍 대학에 가 집안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욕구가 혼합되어 든 생각이었다.

 

2. 자퇴 고민 시작부터 중학교 졸업까지


 그냥 자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점점 수업 시간이 고통스러워졌다. 실제로 수업이 너무나 지루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수업이 재미없다고 믿어서, 재미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점점 따분해진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여러분 대부분이 아시다시피 수업 시간에 상관없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가능은 하다 해도 매우 힘들다. 선생님 눈치를 봐야 하던 것도 있고, 다른 공부를 하는 것에 별 신경 안 쓰는 선생님 시간에도, 발음과 발성 모두 좋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 들어와 집중을 매우 흐렸다. 아무것도 안 하거나 아무것도 못 할 만한 상황은 매우 고통스럽다.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멍을 때리며 하루에 몇 시간씩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물론 교실이 아무것도 없는 방은 아니지만, 수업이 재미없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확증 편향은 나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했다.

결과적으로 이때쯤 나는 매우 고통스러운 학교생활을 했다. 그나마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재미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학교를 마치면 집으로 와서 몸을 쉬고, 유튜브를 보거나 잠시 낮잠을 잔 후 저녁밥을 먹은 후 독서실에 가서 3시간 정도 공부를 하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잤다. 지루한 수업을 듣느니 차라리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놀다가 점심시간이 끝나면 마음 편히 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때는 그래도 학교에 완전히 정이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중학교 3학년 1학기 기말고사 땐 공부를 하긴 했다. 그나마 이때 빼먹고 지나갔으면 안 될 과학 과목의 물리 단원에 나오는 옴의 법칙이나 저항 합성 같은 내용을 공부해 뒀던 게 다행이었다. 이때 지필고사 성적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까지 봤던 시험 중에선 제일 못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1학기가 끝나가던 시점부터 부모님께 자퇴하고 싶다고 슬쩍 떠보는 말도 하고, 학교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기도 시작했다. 부모님은 처음에는 “그래도 선생님에 대한 예의란 것이 있으니 네 공부를 하기보단 수업을 열심히 들어야 한다.” (지금도 난 이 말은 납득할 수 없다. 강의란 것은 배우려고 듣는 것이다.)같은 말이나 “중학교 내용을 잘 해야 나중에 고등학교 내용을 공부하는 것도 수월할 것이다.” (일부분은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3학년 2학기 도형은 좀 더 열심히 해야 했다. 6월 모의고사 이후 피똥 싸게 도형만 했다.)같은 말을 했다. 1학기 마지막에서 전날로 기억하는 날에 한 번 학교를 결석하고 여름방학을 시작했다. 방학 동안 독서실에 가서 정말 자퇴를 했을 때도 열심히 살 수 있는지 확인했을 때 자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매일매일 독서실로 출석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엄마가 준비한 도시락을 가지고 독서실에 간다. 아침의 상쾌한 분위기를 느끼며 공부를 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먹는다. 이따금 친구와 만나 점심을 먹는다. 내가 공부했던 곳은 낮 시간에 해가 워낙 잘 비쳤고, 난 눈부시기도 하고 나른해지기도 해서 낮 시간에 햇빛을 많이 받는 것을 정말 싫어하지만 꾹 참고 저녁까지 공부를 한다. 이후 6~7시쯤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중학생이 스스로 하기엔 꽤나 어려워 보이는 생활을 한 달 남짓 했다. 이를 계기로 부모님도 자퇴에 대해서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2학기가 시작되고 난 다시 학교에 가야 했다. 1학기보다 학교에 가는 것이 더욱더 고통스러워졌다. 방학 때는 몸이 좀 힘들긴 하더라도 마음 편히 내 공부를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학교에서 무의미하고 매우 긴, 영겁 같은 시간을 매일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학기가 시작하고 한 달 동안 2주 정도 되는 기간을 결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 그냥 무단결석으로 처리해 달라고 했지만, 꾸역꾸역 대부분을 병결로 처리해 준 담임 선생님에겐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많이 미안하다. 대략 이때부터 나는 거의 자퇴하는 것으로 결정을 한 것에 가까웠고, 언제 할지가 문제였다. 일단 하루하루 학교를 나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으므로 최대한 결석을 하기 위해 '학업중단 숙려제'를 통해 별도 기관에서 지정된 활동에 참여하고 (3시간 남짓으로 짧다) 출석을 인정받기로 했다. 여러분도 자퇴를 고민하며 학교를 최대한 빠져야 할 일이 있다면 가정학습 사용과 함께 이 제도를 이용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과정을 하기 위해서는 학교 상담 선생님과 상담을 해야 했기에 그것도 진행했다. 학업중단 숙려제 활동은 상당히 즐거웠다. 단순히 고통스러운 학교생활에서 벗어나 즐거웠다기보다는 활동 자체도 흥미로웠고 활동을 진행하시는 분들도 매우 친절하고 좋았기 때문이다. 이동안, 말하자면 난 '힐링'을 좀 했다.

 2주간의 활동을 끝내고 9월 말쯤이 되었을 때, 난 2년 반 동안 학교에 다닌 것이 아깝기도 하고 아는 애들, 친구들과의 관계도 졸업을 통해 깔끔히 끊거나 혹은 잘 이어나가기 위해 자퇴를 하는 것보다는 졸업 후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기로 했다. '숙려제' 제도는 학교 방침상 두 번까지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 12월에 다시 열리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나는 10월에서 11월 약 두 달간 학교를 꽤 잘 출석하며 다녔다. 10월에 중간고사가 있었는데, 나는 자퇴한다는 결정을 굳히기 위해, 또 주변인들에게 그 뜻을 명확히 보이기 위해 전부 0점을 맞는 것에 도전했다. 전부 다 틀리기 위해 공부를 오히려 살짝 해야 했다. 결국, 역사 문제를 맞혀 버려 전부 빵점은 실패했지만, 전교 꼴찌는 달성에 성공했다. 성적표가 나온 이후 담임 선생님에게 한소리 들었다.

중간고사 전교 꼴지를 달성한 나는 학교를 쉬는 시간이나 즐기고 오자는 마음가짐으로 다니기 시작했고, 이때부터는 2학기 초반보다 심리적으로 좀 더 편안해졌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은 진학 문제 때문에 2학기 기말고사를 11월에 쳤는데, 이 기말고사는 공부를 안 하긴 했지만, 아는 것까지 틀리려고 기를 쓰진 않았다. 11월 말이 되어서는 다른 친구들이 고등학교 원서를 쓰는 것을 구경했다. 너는 어디 썼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기적의 성적 상승으로 인문계고를 지원하는 친구를 보기도 했다. 미진학을 결정한 나는 뭔가 따로 할 일이 있을 것 같았는데,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입학 원서를 쓰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당시 상위 50% 정도 내신을 가진 친구가 미래를 위해 일부러 특성화고에 가겠다고 한 매우 주목할 만한 사례가 있었는데, 내 고등학교 미진학 소식 때문에 다소 묻혔다. 나는 3학년 때 워낙 학교를 개판으로 다녀서 결석도 꽤 많고 수행평가 던지기나 2학기 중간고사 꼴찌로 인해 내신이 정말로 낮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상위 38%라는 준수한 성적이 나왔었다. 차라리 인문계고를 가고 싶지만, 성적이 안 돼서 마음 태우던 친구와 성적이 바뀌었으면 했다.

 친구들이고등학교 진학 원서를 쓰고 난 이후, '숙려제' 프로그램에 한 번 더 참가하고 난 나는 놀자판인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이 시기에는 선생님들은 영화 같은 걸 틀어주고, 애들은 몇 명씩 모여서 체스나 카드게임 같은 걸 하곤 했다. 처음에는 이런 분위기에서 기를 쓰고 공부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도 않고 친구들과 함께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나도 같이 끼어서 놀 때가 많아졌다.

 1월 초 나는 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졸업식 날 친했던 친구들 다 함께 놀러 갔다. 물론 연락이 끊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다른 학교에 가서 이렇게 다 같이 놀 날이 거의 없을 거란 생각에 재밌게 놀면서도 쓸쓸했다.


3. 중학교 졸업, 고등학교 미진학 후 6월 모의평가까지


1월에 졸업을 한 후 2월이 되기 전까지는 이전에 다니던 독서실에 다녔다. 이따금 그곳에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오기 때문이기도 했고, 어떤 학원에 갈지 못 정했던 탓이기도 했다.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독학 재수학원들이 어디 있는지 싹 찾아봤다. 집안 사정상 재수 종합학원에 갈 만한 형편은 안 되었다. 학원이 많은 곳이기에 내가 알아볼 곳은 약 5곳 정도가 있었다. 그중 학원비도 싼 편이고 집이랑 가장 가까운 곳을 선택하고(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였다.), 밥값을 아끼기 급식은 신청하지 않고 점심, 저녁 시간마다 집으로 와서 밥을 먹고 다시 가기로 했다. 2월 1일부터 등원하는 것으로 학원비를 결제하고, 남은 독서실 기간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2월부터 독재학원(=독학재수학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7시 30분쯤에 등원해서 10시에 하원하는 생활을 했다. 순수 공부 시간은 인강 듣는 시간은 포함하고, 영단어를 외우는 시간은 빼서 10시간이 조금 넘었다. 갑작스럽게 매우 긴 시간 동안 공부를 하니 매우 힘들었다. 학원 내부 환경이 살짝 건조하기도 했고, 워낙 공부 시간이 길다 보니 안구건조증도 얻었다. 안약과 인공눈물을 요즘도 쓰고 있지만 아직도 완전히 낫진 않았다. 이렇게 상당히 힘들게 약 3주 동안 공부를 했다.

그러다 2월 17일, 대구에서 코로나바이러스 집단감염 사태가 일어나고, 내가 다니는 학원을 비롯한 공부할 수 있을 만한 외부시설이 모두 운영 중단되었다. 지쳐 있던 나는 집에서 잠시 쉴 수 있다는 건 좋았지만, 집 공부가 집중이 얼마나 안 되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론 걱정이 많이 되었다. 며칠간 쉰 후 공부를 재개했다. 확실히 집 공부는 공부 시간이 많이 안 나왔다. 최대로 많이 한 날의 공부 시간이 6시간 정도로 기억한다. 아마 코로나바이러스가 없었으면 기출문제 1회독이 한 5월쯤에 끝나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코로나로 인해 수능도 연기되었으니 어느 쪽이 이득이었을지는 모르겠다. 이때 일과는 공부 좀 하다가 피곤하면 유튜브 좀 보고, 해가 질 때쯤 집 옥상으로 올라가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영단어를 좀 외우고 저녁엔 놀다가 잠드는 것이었다.

재수학원뿐만 아니라 학교도 개학을 미뤘기 때문에, 친구들도 항상 집에 있는 듯했다. 그들도 할 게 없어서 그런지 중학교 친한 친구들끼리는 카톡을 정말 자주 했다. 어쩌면 코로나 덕분에 아직도 중학교 친구들과 연락을 자주 하면서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친구들로부터 "어차피 학교도 못 나가는데, 차라리 일찍 수능 판에 뛰어든 ㅇㅇ이가 승자다."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당시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뭐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코로나가 무섭기도 했고, 집에서 좀 더 편하게 공부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어서 학원이 다시 열린 3월 25일에는 학원에 복귀하지 않았고, 학교들이 개학한 4월 6일부터 등원하기 시작했다. 이때쯤 기본 강좌를 거의 다 들었고, 기출문제들을 풀기 시작했다. 기출문제를 간신히 다 풀었을 때쯤 6월 모의평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수능이 아닌 모의평가는 신청에 고졸 학력 검사를 꼼꼼히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던 나는 6월 모의고사는 정식으로 신청하지 않고 학원에서 시험을 본 후 가채점만 했다. 

 6월의 나는 많이 미숙했다. 난생처음 보는 문제들을 풀어내는 능력도 부족했고, 과탐 모의고사 시간 관리도 어떻게 할지 몰랐다. 특히 수학에서의 도형 문제와 물리의 역학에 너무나도 약했다. 더군다나 지구과학이 어렵게 나오긴 했다지만 개념만 달달 외우면 만점이 나올 줄 알았던 나는 30점대 초반의 점수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전 과목 점수는 96, 81, 97, 45, 32로 등급은 12123이었다. 당시 목표였던 연고대를 가기엔 많이 부족한 점수였지만, 실수로 인해서 틀린 문제는 많이 없었기에 점수가 실력대로 잘 나왔다고 생각하며 약점 보완을 시작했다.


3.5 수험 생활의 외로움


 저번 글들에서도 강조했듯이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수험 생활을 견뎌 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학생들이 학교처럼 지내는 재수 종합반과는 다르게 공부만 시키는 독재학원에서는 등원/하원 시간을 제외하면 학생들이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독서실처럼 공부만 하는 독재학원이라도 그곳의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동창으로 서로 아는 사이인 눈치였다. 그곳에서 나는 외지인인 것만 같았고 서로 친구인 듯한 이들이 학원에서 나오며 타는 엘리베이터에서 잡담하는 것을 보고 외로움을 느꼈다. 하루는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데 갑자기 왈칵 눈물이 터졌다. 흐느껴 울면 다른 사람들 공부에 방해가 될까 봐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줄어드는 디데이도 내 마음에 불안을 더했다. 몰입을 경험하면 시간이 빨리 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몰입하는 환경에서 나는 하루가 너무나도 짧게 지나간다고 느꼈다. 눈을 깜짝하면 주가 바뀌어 있고 달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기계가 된 것만 같았다. 몸이 힘든 것은 참을 만했지만,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고 조금만 있으면 수능을 쳐야 한다는 생각에 잠자리에 누우면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랬다. 

 이런 상황에 나의 거의 유일한 취미 생활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3옥타브의 고음으로 소리를 지르다 보면 외로움을 털어내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마음에 채우는 느낌이었다. 당시 코로나-19 확진자가 계속 나와 사회적 측면에서 보나 감염되지 않으려는 측면에서 보나 노래방에 가는 것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스트레스를 풀 데가 전혀 없어 노래방이 열려 있을 때는 이틀에서 사흘에 한 번씩은 꼭 노래방에 갔던 것 같다.

 

4. 6월 모의평가 후부터 9월 모의평가까지


*이 글에 있는 공부법은 여러분도 이렇게 하라고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전과목 만점도 아닐 뿐더러, 공부에 정해진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했구나 하며 봐 주시면 되겠습니다.


기출은 1회독, 개념서는 그래도 3-4회독 정도 한 나는 새로운 문제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전과목에서 n제(국어는 주간지)를 닥치는 대로 풀었다. 전과목에서 3일 내지 4일에 문제집 한 권을 풀었다. 예외로 지구과학은 기출문제집, ebs 문제집을 분석하며 '나만의 스킬' 같은 것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걸 수능에 써먹지는 않았지만, 이 과정은 자료 해석 능력엔 상당히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공부할 때 모나미 볼펜을 사용했었는데, 약 3일에 하나씩 볼펜심을 다 썼다. 수능이 끝나고 모아 보니 볼펜심 수십 개가 나왔다. 특히 물리 문제집은 정말 많이 풀었는데, 수능 전에 푼 문제집을 다 모으니 10권이 나왔다.

이때 공부한 책의 권수는 많았지만 생활 자체는 그렇게 팍팍하진 않았다. 8시 반에서 9시 사이에 등원하여 밤 10시에 하원했다. 위에 썼듯이 점심, 저녁 시간에는 난 집에서 밥을 먹고 쉬다가 다시 학원에 가곤 했는데, 원래 학원의 점심, 저녁 시간은 1시간 정도였지만 이때 난 거의 매일 집에서 1시간 반 정도를 쉬다가 복귀하곤 했다. 

 8월에는 검정고시를 쳤다. 위에는 쓰지 않았지만 2월에 내가 4월 검정고시를 응시할 수 있는 줄 알고 원서를 쓰려고 고생했는데, 미진학자는 졸업 후년도 4월 검정고시를 칠 수 없다는 걸 모르고 헛수고를 한 후 8월 검정고시에 원서를 접수했다. 그래도 시험인지라 기출문제를 몇 개 풀어 봤는데,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쉬웠고 내가 검정고시 만점이 필요한 사람도 아니었으므로 대비 없이 시험장에 들어갔다. 시험을 다 풀고 남은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기 위해 수학 사설 모의고사 킬러 문제 3개를 외워 갔었다. 하지만 3개론 부족했고 5개쯤은 외워 갔어야 했다.

선택과목을 몇 번씩이나 확인하며 수능 원서를 접수한 후 9월 모의고사를 응시했다. 이 모의고사는 정식 신청을 해서 성적표까지 받아봤었다. 6월 모의고사는 대부분의 틀린 문제의 원인이 실력이 부족해서였지만, 9월 모의고사는 거의 실수로 인해 틀린 것이었다. 원점수는 93, 81, 98, 47, 44로, 등급으로 치면 13113이었다. 수학은 28문제를 풀었지만, 그중 3번(...), 확률 문제였던 17번, 삼각함수 극한 도형 문제였던 28번을 모두 계산 실수로 틀렸으며, 지구과학의 틀린 문제 2개 중 하나는 단순한 오독, 나머지 하나는 무려 답을 수정할 때 가채점 표의 답만 수정하고 OMR 카드를 수정하지 않은 결과였다. 정말로 억울했다. 실수야 어느 모의고사에든 전 과목에서 최소한 하나는 나오는 것이지만, 이 시험처럼 실수가 많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온 것은 처음이었다.


5. 9월 모의평가 후부터 수능 직전까지


 9월 모의평가 이후 나는 강력한 우울감에 젖었다. 시험의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다. 자퇴한 것을 후회했다. 잠을 자며 꿈을 꾸면 거의 항상 학교와 친구들이 나왔다. 그곳에서 아무 걱정 없이 놀고 싶었다. 잠이 깨면 디데이가 줄어든 것을 보며 내일도 오늘이며 모레도 오늘이었으면,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면 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항상 똑같은 루틴의 하루는 내 마음에 불안을 심었다. 입으로는 올해 대학을 가고야 말겠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마음속으로는 정녕 올해 대학을 갈 수 있는지 의문이 많이 들었다. 그냥 내년을 바라보고 공부하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짜증을 심하게 내기도 했다. 식욕 또한 늘었다. 저녁밥은 거의 매일 두 그릇씩 먹곤 했다. 

학원의 다른 사람들이 원장님과 수시 원서 상담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다른 대학은 몰라도 경북대 치대 논술은 써 보는 게 어떨까 하고 고민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평가원 모의고사에서 단 한 번도 1등급조차 받을 수 없었고 더욱이 논술의 시험 유형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수학 100점도 붙을까 말까 하는 치대 수학논술을 붙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결국 수시 원서는 단 한 장도 쓰지 않았다.

이때 공부는 ebs 교재와 실전 모의고사가 주였다. 적중 노림수를 노리고 수학, 과탐 ebs 교재를 3회독씩 하고, 중요해 보이는 문제는 한 번씩 더 풀었다. 정작 수능 시험장에서 체감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말이다. 실모(실전 모의고사)는 실수를 잡아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엄청난 양을 풀어댔다. 국수탐 실모를 하루 1회분씩 푸는 게 보통이었다. 풀고 또 풀다 보니 어느 정도 실수가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가지 공부를 하다 보니 점점 실제 시험에서의 점수가 높아져 갔다.

디데이가 다가올수록 시간이 딱 한 달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수능 직전쯤에 코로나바이러스가 기승이었는데, 이 때문에 인터넷에 수능이 재연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글이 많이 올라왔고 나도 내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우리 엄마가 세계에 있던 큰 사건들을 전부 적중한 무속인인데, 이번 수능이 연기될 운명이라더라." 하는 글이 떠돌았다. 이 글은 그저 관심을 받고 싶던 사람이 조작한 글로 밝혀졌지만, 나는 원래 이런 걸 믿는 사람이 정말 아닌데도 불구하고 수능 전전 날까지도 수능이 다시 연기될 것이라고 믿었다. 수능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나는 실력 좋은 사람들 중에서도 공부가 안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위안 삼으며, 얼마나 공부를 더 하더라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느낄 것이라며 자신을 위로하며 수능을 맞았다.


6. 수능 날 썰


 수능 전날 나는 별달리 공부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하다가, 밤이 되자 영어 과목 모의고사를 한 회차 풀었다. 정말 아깝게 1등급을 맞지 못한 점수가 나와 살짝 실망하고, 결전의 날에 필요한 준비물을 모두 챙긴 후 잠자리에 누웠다.

 문제는 그날 잠이 너무나도 안 왔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6월, 9월 모의고사 날에도 잠을 조금 설치기야 했지만, 시험에 영향이 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수능 전날엔 상황이 달랐다. 잠이 살면서 손에 꼽을 정도로 안 왔다. 밤 열한 시에 자리에 누워 무려 세 시간 동안 잠을 청했음에도 정신이 생생했다. 수능 날 먹으려고 아껴 둔 청심환도 그때 다 먹고, 인터넷에서 불면에 도움이 된다는 온갖 행위들을 해 보고, 8년 만에 엄마 옆에서 자려고 안방에도 가 보고, 혹시나 피곤해져서 잠이 잘 오지는 않을까, 자위행위까지 했는데도 잠은 오지 않았다.

 꼼짝없이 재수인가 싶어 불안한 상태로 새벽 네 시가 되고, 마지막 방법으로 난방이 잘 되어 따뜻한 동생 방에서 동생을 쫓아내고, 유튜브에서 수면 유도 음악을 틀어 놓고 있으니 의식이 흐려지며 잠을 자는 데 성공했다. 

 잠을 세 시간 남짓밖에 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능 날 아침은 호르몬 작용에 의한 고양감으로 인해서인지 정신이 맑았다. 수능 시험장은 집에서 멀지 않은 위치, 늦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이르지도 않은 시간에 시험장 교실에 입실했다. 친구들은 응원하러 나오겠다면서 결국 나오지 않았다... 

 수능을 치기 전, 수능 시험을 보면 굉장히 긴장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별로 긴장은 되지 않았다. 잠을 잘 못 자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국어 시간 두 번째 문제 이후로는 별로 긴장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날 밤이 몇백 몇천 배는 긴장되었던 기분이다. 첫째 시간인 국어 시간은 무난하게 넘어갔다. 결과는 95점, 어려웠던 시험에서 입시에 큰 도움을 준 과목이다. 

 두 번째 시간은 수학 시간, 매우 당황스러웠다. 전통적으로 어렵게 나오던 주제는 3점짜리 주는 문제로 나오질 않나. 보통 가장 어려운 문제는 마지막 문제인데 뜬금없이 20번이 끔찍하게 어렵게 나왔고 체감상 전체적인 난이도는 문제를 어렵게 내기로 소문난 사설 모의고사만큼 어려웠다. 시험 시간이 끝나갈 때쯤 손이 벌벌 떨릴 정도로 급박했지만 다행히 실수 없이 아는 것만큼은 다 마칠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결과는 92점.

 수학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친구들끼리 같은 반에 배정되었는지 서로 답을 맞춰 보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답이 다르게 나와 불안해졌다. 알고 보니 내가 맞고 그들이 틀린 것이었지만. 점심으로는 떡갈비와 밥, 귤을 먹었다. 옆자리 모르는 학생에게 말을 걸어 시험 이야기를 좀 하고 난 뒤, 난 귀마개를 빌리고 그는 초콜릿 몇 조각을 받아 갔다. 귀마개를 끼니 거슬리는 답 맞춰 보는 소리가 안 들려 좋았다. 

 영어 시간과 한국사 시간은 무난하게 넘어갔다. 배정된 학교의 음향 시설이 좋아 듣기 평가 음성이 잘 들려 좋았다. 두 과목 모두 그동안 공부한 시간에 차라리 수학이나 더 할 걸 그랬다 싶을 정도로 쉽게 나왔다. 결과는 각각 97점과 45점.

 물리 과목을 수능에서 가장 못 봤다. 당시 나는 물리를 가장 잘 하던 터라 자만심에 차 있던 상태였는데, 그해 물리 시험이 매우 쉽게 나와 한 문제라도 틀렸다간 상대평가 시스템에서 큰 불이익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풀이에 시험 시간의 절반도 쓰지 않았는데, 실수를 했는지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고 마지막 지구과학 시험을 잘 보게 해 달라고 기도 비슷한 것을 했다. 가장 못 본 시험이 그 과목이었는데 말이다. 한 문제만 틀려도 치명적인 물리 과목을 두 문제나 틀려 45점을 맞고 말았다.

 지구과학 과목은 그해 유독 어렵게 나왔는데, 다행히 잘 보았다. 지구과학 시험을 보면 시험 시간이 적어도 5분에서 많으면 15분까지 남고는 했는데, 그 시험에선 거의 시간을 다 썼다. 결과는 하나를 틀려 47점.

 모든 과목 시험이 끝나고 방역 관련 문제로 시험을 본 학교에서 몇십 분을 기다렸다. 잘 봤다는 기대감과 실수하거나 못 푼 문제들 때문에 대학 진학에 걸림돌이 생길까 하는 불안감에 몸이 떨렸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공기는 유독 차게 느껴졌다.

 

 

7. 수능 이후 원서 쓰기, 합격


수능 직후에는 완전히 개판으로 살았다. 휴대폰을 하다가 새벽 6시에 잠들어 낮 2시에 일어나는 등 밤낮이 바뀐 것은 기본이고, '기상 시간'이 새벽 2시였던 날 또한 있다. 근심이 있다면 혹시 OMR 마킹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것 때문에 놀아도 완전히 편하게 놀질 못했다. 다행히 실제 수능 성적표는 가채점 결과와 동일했고, 이후엔 정시 원서를 쓰는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물리 3등급으로 인해 연세대는 갈 수 있을까 했는데, 불수능이었던 국어를 잘 본 것으로 인하여 연고대는 정문을 박살낼 정도로 잘 본 성적이었고, 물리로 인해 백분위는 처참했지만 물리의 표준점수는 만점과 그렇게까지 차이 나지는 않아서 의대와 치대에 원서를 쓸 수 있는 성적이 되었다. 원서를 쓰기 전엔 대구 사람이기에 경북대 치대에 가고 싶었는데, 수학 반영비가 높은 경북대의 특성으로 인해 합격 가능성도 불투명했으며, 다른 대구권 의대는 과학탐구 반영 비율이 높아 원서를 썼다간 불합격이 거의 확실했다. 또 아는 의사 선생님이 “의대와 치대에 둘 다 갈 수 있다면 무조건 의대로 가라, 나도 치과의사 친구들 많이 아는데, 노동 강도 차이가 장난이 아니다.” 같은 말씀을 하셔서 결국 가, 나, 다군에 의대, 치대, 의대를 쓰곤 추가로 대구경북과학기술원, DGIST에 원서를 넣었다.

 DGIST에 최초합격했지만, 나는 그곳에 등록은 하지 않았다. 가, 나, 다군에 넣은 원서 3개 중 하나는 붙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군은 광속으로 탈락했고 가군과 나군은 언제 추가합격이 될지 기약이 없던 상태였다. 모 입시 분석 사이트에서는 내가 가군과 나군에는 합격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추가합격 일자가 끝나가도록 붙지를 않으니 정말 초조했다.

 “3곳 모두 불합격하면 어쩌지?”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던 나는, 결국 추가합격 마지막 날의 아침에 경상대 의대, 그날 저녁 8시 30분, 정시모집 전체 마감 30분 전에 나군의 치대에 합격하곤 다음 날 경상대에 등록했다. 나의 노력이 합쳐져 합격증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이렇게 나의 2년 동안의 이야기가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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