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일 년은 잠시 멈춰도 결코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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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 경쟁에 길들여져 있다. 조기 입학, 최연소 합격, 조기 졸업 등 누구나 살면서 자연스럽게 만날 순간들을 남보다 조금 더 빨리, 일찍 다다르는 것이 미덕인 줄 알고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일등’ 자리 앞에 ‘최연소’라는 수식어를 보태려고 쉼없이 앞을 향해 달리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상당수의 젊은이들은 그 경쟁에서 뒤처져 낙심하고 있거나, 아예 뛰어들기를 꺼리며 인생 외곽에서 목표 없이 서성거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갭이어Gap Year가 그런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으나, 19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갭이어는 짧은 역사에도 이미 유럽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는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봉사, 여행, 교육, 인턴 등 자기주도적 체험활동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기간을 일컫는다.
우리가 잘 아는 로이킴은 미국 조지타운대 경영학과에 합격한 뒤 입학 전에 갭이어를 가지며 슈퍼스타K 4에 도전해 우승자가 되는 기쁨을 만끽했다. 영화 <해리 포터>에서 헤르미온느 역을 맡은 엠마 왓슨 역시 고등학교 졸업 후 브라운대에 입학하기 전 갭이어를 가지며 패션기업 피플트리에서 연기자가 아닌 패션디자이너로 일했다. 영국의 윌리엄 왕자도 칠레 파타고니아에서 10주 동안 어린이 영어교육 봉사자로서 갭이어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나 또한 2004년 남미 페루에서 일 년 동안 해외봉사를 하며 갭퍼Gapper로서의 잊을 수 없는 삶을 살았기에 이에 대해 잠시 소개한다.
고교 졸업도 아니고 대학 졸업 후 해외 봉사를 떠나는 내 심정은, 취업을 1년 유예하는 것이었기에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로 가득 차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마추픽추’와 ‘나스카 라인’이 있는 나라, 땅덩어리가 커서 네 가지 기후가 공존하기 때문에 모든 과일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나라, 감자와 옥수수의 원산지, 그리고 잉카의 후예들….
대한민국의 끓어오르는 피를 가진 청춘이 바로 이런 페루에 가서 그곳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리라!’고 발걸음을 뗀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도착한 페루의 수도 리마는 훔볼트 한류가 지나가는 해안 사막 기후대라 1년 내내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 도시이고 도둑도 정말 많았다. 스페인 군이 잉카 제국을 침공하면서 원주민들에게 침략의 본거지로 정착하기 좋은 곳이 어디인지 물었을 때 원주민들이 추천한 곳이 ‘리마’라고 하니 좋은 날씨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혼자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에서 중국인 여자가 다가오더니 ‘페루에 온 지 얼마나 되었냐?’고 영어로 물었다. ‘한 달 됐다’고 하니 ‘어디 가냐’고 물으면서 ‘택시비를 줄 테니 빨리 내려서 택시를 타고 가라’고 했다. 나는 당황하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이 버스에서 나와 당신 빼고는 다 도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페루에는 날치기가 많아 카메라나 휴대폰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 정도로 도둑이 많고, 날씨도 좋지 않고, 음식도 입맛에 맞지 않는 데다 말도 잘 통하지 않으니 처음 떠날 때의 의기양양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모든 것이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찼다.
그렇다면 이런 불편하고 생경한 경험들 때문에 페루에서의 일 년이 후회로 점철된 시간이었냐고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다녀온 후 새록새록 드는 생각이, 처음의 예상과 달랐던 많은 상황과 환경 때문에 오히려 사사로운 마음을 ‘포기’할 수 있었고 빈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수도 리마에서 26시간 떨어진 정글에서 보낸 18일 간의 봉사 시간은 정말 싫었지만 결국 가장 보람찬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정글에 전기가 있을 리가 없으니 호롱불 밑에서 저녁시간을 보냈고, 매일 강에서 씻으며 아침, 점심, 저녁 세 끼 모두를 ‘구운 바나나, 삶은 바나나, 튀긴 바나나, 애벌레를 넣고 으깨서 만든 바나나’로 해결했었다. 그러면서 이미 굳어져 있던 사고방식을 벗어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아 몸부림쳤는데 이렇게 몸소 체험하면서 느낀 것들이 지금 나를 있게 만든 터전이라 믿는다.
나환자 마을에 가서 현지 청년들과 봉사활동도 하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도시라 해서 일명 ‘세계의 지붕’ 이라고 불리는 해발 4,250m의 ‘세로데 파스코’에서 한국인 최초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인터뷰도 하고 한국 노래도 불렀다. 쎄로 데 빠스코로 가는 길에 만난 폭동으로 도로가 막혀 해발 3,800m의 산길을 60km나 걷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보통의 대학생들이 그런 것처럼, 바쁜 학교생활과 스펙 쌓기에 분주했던 내가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것들에 대해 감사할 수 있고, 무엇이 진정 중요한가에 대해 사고할 수 있었던 이 시간은 페루라는 나라와 함께 내 청년시절에 자리잡고 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갭이어. 세계의 명문대학들에서도 환영받는 제도로, 특히 미국에서는 대학 내에 자체적으로 이러한 코스를 정착시키는 추세이다. 하버드대 입학처장은 ‘우리는 학생들이 시야를 넓히고 일상에서 벗어나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 학교 생활을 더욱 효율적으로 보내게 된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MIT는 해외 봉사프로그램의 권장과 함께 재정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으며, 프린스턴대는 자체적인 갭이어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용하고 있다. 일본 도쿄대도 ‘Freshers’ Leave Year’란 제도를 통해 신입생들이 입학과 동시에 봉사, 해외 탐방 등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이를 시행하기 위해 입학 시기를 9월로 연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대학의 주류 문화로는 아직 정착되지 않았지만 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며 학생들 및 학부모들 사이에서 점차 인기를 더해 가고 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떠나보라! 진정 자신이 원하는 일, 자신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할 시간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필요하다. ‘페루에서의 해외봉사 1년’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계기를 가진 나는 그 이후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에게 새로운 삶의 자세를 제시하고 그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멘토링을 하고 있다.
2014년 새해가 밝았다. 취업이나 진로를 고민하며 스펙 쌓기를 위해 휴학을 계획하고 있다면,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어떻게 자신을 투자할 것인지를 찾아가는 ‘갭이어’를 먼저 경험해보길 바란다.
글쓴이 최은성
현재 월간 <투머로우>에서 기획이사로 마케팅과 홍보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타고난 친화력과 집요한 섭외력을 지닌 그가 이번에 대학 시절 경험했던 해외 봉사 체험담을 독자들에게 전해 주었다.
정리 | 김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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