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등급의 시험지라는 환상에서 벗어납시다.
게시글 주소: https://w.orbi.kr/00063775588
칼럼 내용은 정답이 아닙니다. 본인에게 맞는 공부법이 있다면 쭉 밀고 나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안녕하세요, 쭝오리입니다. 두 번째 칼럼이네요. 지난번 칼럼에서 '문장을 제대로 읽는 것'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앞으로의 칼럼에서는 '지문을 잘 읽는 법'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방법론적인 부분은 다음 칼럼부터 다루고, 오늘은 지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아래 칼럼을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먼저 읽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칼럼] 당신이 비문학을 두려워하는 이유 https://orbi.kr/00063142006
-
0. 독서 영역의 대전제
'정확한 이해 없이는 고득점이 힘들다.' 제가 생각하는 독서 영역의 대전제입니다. 흔히들 '킬러 문제', 혹은 '보기 3점'이라고 불리는 문제들은 지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추론을 요구하는데, 이는 지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죠. 따라서 앞으로 제 칼럼에는 비법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전부 지문의 정확한 이해를 위한, 뻔하고, 당연한 말들이죠. 뭔가 특별한 비법을 바라고 들어오신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정도를 걷다 보면 어떤 유형의 문제가 나와도 대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독서 지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아봅시다.
1. 독서 지문은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독서 지문과 직면한 순간, 막연한 불안감과 거부감이 들곤 합니다. 파본 검사 때 흘깃 봤던 어렵고 추상적인 단어들이나, 철학자의 이론이 우리를 덮칠 것만 같거든요. 이런 기분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시험을 보며, '이번엔 어떤 지문이 나올까? 신난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흔치는 않으니까요.
저는 여러분께 위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저런 막연한 불안감과 거부감이 지문을 읽고 문제를 푸는데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간단한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겁니다. '독서 지문은 나의 적이 아니다.' 라고요.
간단하게 RPG 게임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해치워야 하는 궁극적인 대상, 몬스터는 문제들입니다. 이 문제들은 지문을 읽지 않고서는 풀어낼 수 없죠. 지문은 몬스터들을 해치울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원석입니다. 이 원석을 잘 분해하고, 가공해 '나만의 무기'를 만들어 낸다면 손쉽게 몬스터를 해치울 수 있겠죠. 처음에는 잘 안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고, 원석을 잘못 가공해 목적 달성에 실패할 수도 있죠. 이는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문을
'내가 해치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를 도와주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지문과 함께' 가는 겁니다.
간단한 말장난 같죠? 맞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게 지문을 앞에 두고 불안해하거나, 막막해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겁니다. 이게 잘 안된다면 차라리 '그 칼럼 글 그냥 개소리였네' 하며 피식 한 번 웃어 주고 들어가세요. 차분하고 침착하게 읽을 준비가 되었다면 성공입니다.
2. 천천히, 천천히, 정확하게 읽읍시다.
독서 만점은 천천히, 정확하게 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조급해 하지 마세요. 저번 칼럼에서도 언급했듯이, 글을 천천히, 곱씹으며 정확하게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나는 천천히 읽는데?'하는 분들은, 읽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저번 칼럼에서 제가 생각하는 독해의 정의를 말씀드렸습니다. 눈으로 문장을 읽고, 문장의 내용이 머리까지 와야 '진짜 읽은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가르친 대부분의 학생들은 눈으로만 읽고, 혹은 눈으로 읽고, 속발음으로 읽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생각이 수반되지 않으면 글을 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천천히 읽읍시다. 내 사고의 속도와 눈의 속도를 맞춰야 합니다. 이미 눈으로 읽고 속으로 발음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면 그냥 2번 읽읍시다. 한 번 읽고, 문제를 푸는 데도 시간이 모자란데, 2번씩 읽을 수 없다는 분들은 연습 과정에서 비교해보시면 됩니다. 지문을 3분만에 읽고 문제에 10분을 쓰나, 지문을 10분 동안 읽고, 문제에 3분을 쓰나 결과적으로 걸리는 시간은 비슷합니다. 차이점은 발전 가능성과 확신이죠. 지문을 꼼꼼하게 읽고, 이해에 충실했다면 3분 만에 고른 정답에도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지문을 읽는 속도는 연습 과정에서 빠르게 상승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뻔하고, 당연한 말인가요? 뻔하다는 말은, 많이 들어본 말이라는 겁니다. 누구나 아는, 당연한 것부터 실천합시다. 비문학 만점이요? 지문 잘 읽고, 이해하고, 문제 잘 풀면 됩니다. 당연하죠? 이 당연한 말을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냐가 점수의 차이를 만듭니다. 정도를 걷는 겁니다. 뻔하고, 당연하게요.
3. 1등급의 시험지라는 환상에서 벗어납시다.
'1등급의 시험지는 기호와 밑줄이 거의 없고, 깨끗하다.' 제가 현역일 때부터 있던 말인데, 요새도 많이 쓰이는 말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맞는 말도 아니죠. 제 생각대로 고쳐보면, '1등급 학생들은 시험지에 기호나, 밑줄을 굳이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가 맞는 말 같습니다. 저의 경우도 그렇고, 높은 1이나 1등급이 고정으로 나오는 학생 분들은 공감하실 겁니다. 국어 과목의 최상위권 학생들은 지문에 샤프 한 번 대지 않고 눈으로만 읽고 문제를 풀든, 지문에 기호와 밑줄로 색칠 공부를 하며 풀든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기호와 밑줄의 잦은 사용이 '굳이'인 이유입니다.
저는 기호나 밑줄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별 생각이 없고 그냥 쓰기 귀찮다 정도입니다(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남이 역접에 세모를 치든, 비례 관계에 화살표를 그리든, 신경도 안 씁니다. 제게는 그런 기호들이 필요하지 않고, 저는 차라리 메모를 하는 편이거든요.
계속 언급했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겠습니다. 무작정 기호를 줄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사용하고, 줄일 필요가 있는 기호들은 줄이자는 거죠. 기호를 줄인다고 성적이 오르는 것도, 기호를 많이 쓴다고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아래 경우들과 같이 기호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여러분의 독해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본인이 아래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되면 주의 깊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 사고의 전개를 기호로 대신하는 경우
2) 기호로 인해 정보가 아닌 것이 정보가 되는 경우(정보량이 늘어나는 경우)
1) 부터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문장에 밑줄을 긋고, 단어에 동그라미를 치고, 기호를 사용하시나요?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문장을 읽는 도중에, 혹은 읽기 전에 사용하곤 합니다. 역접에 반사적으로 세모 표시를 하고, 부정에 반사적으로 x 표시를 하고, 연결되는 단어나 내용이 있으면 반갑게 화살표로 연결합니다. 질문드리겠습니다. 기호를 치기 전에 문장의 내용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셨나요? 기호는 우리가 문장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함으로써 우리 머릿속에 내용을 다시금 박아주는 용도로 쓰여야 합니다. 문장을 읽고, 생각하고, 그다음 기호를 사용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문장을 자연스럽게 2번 생각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문장을 읽고 제대로 생각하는 게 익숙해지면, 그때는 기호가 '굳이?'가 되는 겁니다.
문장을 읽는 도중에 기호를 사용하다 보면 사고의 전개를 기호로 대신하게 되고, '내가 이 문장을 이해했다'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기호가 주는 편리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내 생각은 누가 대신해 주지 않습니다. 기호에 의존한 생각으로는 이해와 추론을 묻는 고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래는 몇 달 전 제 학생의 실제 예시입니다. 지문은 18학년도 수능 오버슈팅 지문입니다. '어려운 척'하는 대표적인 지문이죠. 정보량이 많은 척, 복잡한 척하지만 제대로 들여다보면 상당히 친절한 지문입니다. 읽어봅시다.
(가)
오버슈팅의 정의와 발생 원인에 대해 설명한 부분입니다. 오버슈팅의 발생 원인으로 물가 경직성과 금융시장 변동에 따른 불안 심리 등을 제시했고, 다음 문장에 물가 경직성의 정의가 나왔으니, 다음 문단에서도 물가 경직성과 오버슈팅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겠구나, 하는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다음 문단입니다. 두 번째 문단에서는 물가와 환율의 조정 과정을 장기와 단기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오버슈팅의 정의에서 오버슈팅은 단기에 발생한다고 알려줬으니, 우리는 단기에 집중해야겠네요. 물가와 환율은 장기에는 둘 다 신축적으로 조정되나, 단기에는 환율은 신축적, 물가는 경직적으로 조정된다고 합니다. 아, 이래서 오버슈팅의 원인으로 물가 경직성을 제시한 것이었군요. 정리해보면, 오버슈팅은 단기에 환율은 신축적으로 조정되는데 비해, 물가는 경직적으로 조정되는, 물가 경직성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장기에서의 환율(균형환율)과 실질 통화량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기에서는 물가와 환율이 모두 신축적이었죠. 물가 경직성에 의해 오버슈팅이 발생할 수 있는 단기에 비해 정상적입니다. 그래서 이 장기의 환율을 균형 환율이라고 본다고 합니다.
다음 문장부터는 예시인데, 단순히 정보라고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장기와 단기 내용을 생각하며 읽어야 합니다. 국내 통화량이 증가하면 장기에는 자국 물가가 높아져 장기 환율이 상승한다고 합니다. 이때 실질 통화량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고요.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안 됩니다. 분명 앞에서는 오버슈팅에 대해 신나게 설명했습니다. 핵심은 단기였고요. 그럼 자연스럽게 '단기는 어떤데?'라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생각의 전개를 막지 마세요. 지문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추측해 보면, 단기에는 물가가 경직적으로 조정되기 때문에 통화량이 증가해도 물가 상승이 바로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통화량을 물가로 나눈 실질 통화량은 증가하겠네요. 물가는 경직적이니까요.
(나)
위에서 추측했던 내용이 다음 문단에 그대로 제시됐습니다. 기호를 통한 단순한 정보처리가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지문 내용을 더 매끄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위 (가)를 읽는 과정에서, 단순히 환율과 물가가 장단기에서 어떻게 조정되는지 체크하고, 통화량과 물가, 실질 통화량의 관계만 체크했다면 정보량도 많아지고 지문의 내용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으로 읽었으면, 손보다 머리를 먼저 써야 합니다. 손의 차례는 그다음입니다.
2)로 가봅시다. 독서 지문에는 많은 정보들이 들어 있습니다. 지문을 읽고 문제를 푸는 입장에서는 정보는 소소 익선이죠. 최대한 줄이는 편이 기억하기도 편하고, 압박도 덜할 것입니다. 후에 '정보량 줄이기' 칼럼에서 다시 서술하겠지만, 정보를 줄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기'입니다. 정의나 개념처럼 대놓고 "나 정보야!" 하는 내용 말고 이해로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은 넘어가는 거죠.
문제는 무의식적인 기호 사용으로 인해 쓸데없는 정보가 늘어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시로 확인하겠습니다.
슈퍼문 지문입니다. 첫 문단에서 타원과 장축, 이심률의 정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심률의 정의가 '두 초점 사이의 거리를 장축의 길이로 나눈 값'이라는 내용을 읽자마자 'd/D'처럼 메모를 한다면, 우리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두 초점이 가까울수록 이심률은 작아진다는데, 초점이 가까워지면 장축도 함께 줄어드는 거 아닌가?' 따위의 의문이 생길 수도 있고, '초점 거리↓ -> 이심률↓' 과 같은 메모가 늘어날 수도 있죠.
한 발짝 떨어져서 봅시다. 지문에서 두 초점이 가까울수록 이심률은 작아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연히 초점이 멀어지면 이심률은 커지겠죠? 어, 그러면 '이심률은 두 초점이 서로 떨어진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구나'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겁니다. 변수를 만들어 분수 꼴로 적기 전에 의미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거죠(BIS 지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문 내용을 바탕으로 여기서 더 확장하면 '이심률이 작아지면 원에 가까워지다가, 두 초점이 서로 만나면 원이 되겠구나!'까지 갈 수 있죠. 이 내용을 이용한 게 첫 지문의 정답 선지였습니다.
다음 문단으로 가봅시다. 원지점과 근지점의 정의를 언급하고, 슈퍼문이 보름달 중 크게 보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문단의 마지막 5줄 정도를 슈퍼문이 크게 보이는 이유, 겉보기 지름, 각 지름 등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 부분에는 정보가 없습니다. 왜냐면 당연하거든요.
슈퍼문은 왜 크게 보일까요? 보름달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가까우면 당연히 겉에서 보는 지름이 커지겠죠? 겉보기 지름을 각도로 나타낸 것을 각지름이라고 하니까 거리가 가까우면 당연히 각지름이 커질겁니다. 왜? 겉보기 지름이 커졌으니까요. 겉보기 지름이 왜 커졌는데요? 보름달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너무 쉬운 지문을 가져와서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실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구요. 하지만 비문학 성적 상승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할 줄 아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자신의 시험지를 펴보고, '굳이?'라고 느껴지는 기호부터 차례로 지워 나가다 보면,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안녕하세요 ! 칼럼은 정말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다만 읽다보니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서 질문드립니다. 혹시 지문의 완벽한 이해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어느정도까지 이해해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지문에서 모든 문장이 납득 가능한 선에서 막힘없이 뚫린다면 성공입니다. 가장 쉽게 알아보는 방법은 스스로에게 지문을 해설한다고 생각하고, 그게 가능하면 이해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기출 분석은 위 방법처럼 진행하시고, 꾸준히 연습하시다보면 시험장에서도 편하게 읽고 푸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